노벨 문학상

노벨 문학상 1951년 수상자

돋보기쓴꼬부기 2025. 3. 30. 11:33
728x90
반응형
BIG

★  페르 라게르크비스트(Pär Lagerkvist)는 서술형으로 작성해 보았습니다. ★

Pär Lagerkvist

 

페르 라게르크비스트(Pär Lagerkvist, 1891-1974) :

스웨덴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로, 20세기 스웨덴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은 인간 존재, 신앙, 도덕, 죽음과 같은 깊은 철학적 주제를 다루며, 그의 스타일은 때로는 어두운 분위기와 비판적인 시각을 보입니다. 라게르크비스트의 인생을 통해 그가 어떻게 그려낸 세계관과 문학적 유산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페르 라게르크비스트(Pär Lagerkvist)의 인생을 몇 페이지로 요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의 삶은 글쓰기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한 기자가 그를 인터뷰하면서 자신을 어떻게 묘사할지 물었을 때, 그는 “내 책에서 나를 찾아라”고 말하며, 자신의 글이 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을 전했다. 종종 위장된 방식으로, 때로는 명백히 자서전적 요소가 드러나는 그의 글에서는 “나는 살기 위해 글을 쓴다. 일은 나의 진정한 삶이다”라는 그의 고백이 묻어난다. 또한, 그는 “나는 나 자신과 영원한 대화를 나눈다. 내 글쓰기는 내 삶에 대한 긴 분석이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고 덧붙였다. 이 영원한 대화는 주로 삶, 죽음, 영원이라는 존재의 본질적인 요소들과 자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일관성과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에 집중했다. 그의 글은 인간 삶을 지배하는 다양한 감정 사이의 긴장과 변화를 명확히 드러내려고 했던 결과물이다. 20세기 스웨덴 시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삶의 문제를 탐구한 그의 문학적 정신은 1951년,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주었다. 그의 시는 인간 존재에 관한 영원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예술적 힘과 깊은 독립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글쓰기는 자서전적 성격을 강하게 띠며, 그의 삶을 다루는 이들에게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주먹(THE FIST)1934년 초판 사인

페르 라게르크비스트는 1891년 5월 23일, 스웨덴 벡셰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가족은 방 두 개와 부엌 하나가 있는 집에서 살고 있었고, 벡셰 역 맞은편에 위치한 레일웨이 식당 건물 2층에서 거주했다. 그의 아버지 안데르스 라게르크비스트(Anders Lagerqvist)는 역에서 철도 조차장 감독으로 일했으며, 어머니 한나(Hanna)는 주부이자 어린 시절부터 재봉사 교육을 받아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1895년, 라게르크비스트 가족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서 왼쪽부터 엘린(Elin), 힐마(Hilma), 군나르(Gunnar), 아버지 안데르스(Anders), 애니(Annie), 페르(Pär, 당시 4살), 클라라(Klara), 스티나(Stina), 어머니 한나(Hanna)가 나란히 서 있었다.


페르 라게르크비스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골에 있는 친척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동화 스타일의 간단한 이야기나 민속적인 삶을 묘사한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자신만의 문학적 색깔을 찾기 위해, 그가 원래 익숙했던 온화하고 신중한 장르에서 벗어나 과감히 날개를 펼쳤다. 그의 부모는 그가 작가의 길을 가겠다는 결정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의 꿈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형제자매들, 특히 애니와 스티나는 달랐다. 그들은 교사로 재직 중이었고, 방학 동안 글쓰기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며 그의 창작 활동을 지지했다.
그의 첫 번째 글은 1905년 10월, 당시 14살의 나이에 스몰란스포텐(Smålandsposten) 신문에 기고한 편지였다. 이 글에서 그는 벡셰의 학교 아이들에게 적대감을 경고하며, 계급 간 증오의 시작을 언급했다. 당시의 그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민감한 시각을 가졌으며, 교육과 사회적 갈등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쓴 글은 신문사와 학부모들에게 적합한 내용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띠었지만, 그의 문학적 성향과 사회적 비판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 벡셰 학교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이 마을의 모든 남학생은 벡셰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에서도 문법 학교와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만연한 적대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증오가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확실히 사실이 아니며, 그것은 스웨덴에 그토록 치명적인 계급적 증오의 시작일 뿐이다. 학창 시절 내내 문법 학교 학생을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의 상류층을 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초등학교 출신의 소년이 얼마나 쉽게 유해한 사회주의에 빠질 수 있겠는가. 반면에, 문법 학교의 학생은 초등학교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더 성숙한 나이에 전체 노동 계급을 쉽게 증오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지들이여, 우리는 이러한 악행을 제쳐두고 대신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의 참된 선을 증진하기 위해 만장일치로 노력해야 합니다." - 14살떄 스몰란스포텐(Smålandsposten) 신문에 게재한 기고문-


고등학교 시절, 페르는 급진적인 좌파적 성향을 띤 주제의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부모님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다루기 위해 가명으로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또한, 그는 문법학교 협회인 헤임달(Heimdall)에도 참여하여 유머와 풍자를 담은 글을 선보였고, 다소 도발적인 내용도 다루었다. 그는 또한 '레드 링(Red Ring)'이라는 좌파 단체를 결성하여 매주 일요일 모임을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 벡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910년 6월 1일,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페르는 집을 떠나 유랑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웁살라 근처 비팅게에서 형 군나르와 함께 지냈다. 비팅게에서 그는 문학과 미술사를 공부할 계획이었으나, 실제로는 글쓰기에 더 집중했다. 그는 이곳에서 카린 칼슨(Karin Carlsson)과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1912년에 약혼했다. 카린은 예술적 재능을 지닌 인물로, 페르의 실험적인 산문 데뷔작 메니스코르(Människor)의 표지 장식을 맡았다.
그러나 1913년 초, 페르는 카린과 함께 미술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나려 했으나, 카린의 어머니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페르는 혼자서 파리로 향했다. 그가 해외에 머무는 동안 둘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결국 약혼은 파기되었다. 이 일로 페르는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예술적 재능마저 의심하게 되었다.
1915년, 그는 군 복무 소집 통지를 받았지만, "만성 신경 질환과 전반적인 쇠약"이라는 진단을 받아 면제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16년 그는 자신이 진정한 데뷔작으로 간주하는 시집 Angest를 출간했다.

 
페르는 1915년 늦겨울, 노르웨이에 머물며 그가 평온과 고요 속에서 자신을 찾고자 했던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카렌 쇠렌센(Karen Sørensen)이라는 여성을 만났고, 둘은 점차 가까워졌다. 카렌은 애정이 결핍된 유년기를 보낸 인물로, 그녀의 강렬한 개성과 매력에 페르는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불안정했고, 여러 갈등과 애증 속에 이어졌다. 결국 1917년, 카렌은 임신을 하여 1918년 5월 페르와 결혼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딸 엘린이 태어났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다. 1924년, 그들은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페르 라게르크비스트(Pär Lagerkvist)의 대표작들은 그의 문학적 정신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로, 인간 존재와 그 의미에 대한 깊은 탐구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며, 삶과 죽음, 신앙과 무신론 등 중요한 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성찰을 제공합니다. 그의 대표작들은 주로 시와 소설 형식으로 출간되었으며, 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기독교적인 인간" (Kristus och de unga) - 1917년 발표된 이 작품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신앙과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종교적 신념과 인간의 고독한 존재를 대비시켜, 신앙이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합니다. 페르는 당시의 사회적 혼란과 무신론의 물결 속에서 신앙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뤘습니다.
"악마" (Demonerna) - 192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의 대표적인 소설로, 인간 내면의 악마와 선의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주인공은 내면의 악마와 싸우며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물로, 인간의 본성과 그 안에 숨겨진 악의 존재를 탐구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불완전성과 내면의 갈등을 주제로 삼고 있어 그의 문학적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노인의 집" (Åldermännen) - 1931년 발표된 이 작품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가 인간의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 소설입니다. 노인의 삶과 죽음을 중심으로 한 이 작품은 인간의 유한성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인간 존재의 마지막 순간을 그리려는 그의 철학적 노력이 엿보입니다.

"바르바로스" (Barbaros) - 1935년 발표된 이 소설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가 인간의 사회적 본능과 폭력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 작품입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간 사회의 잔혹함과 본능적인 폭력성을 그리며, 인간 존재의 어두운 면을 조명합니다. 이 작품은 그의 문학 세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 (Vi som var döda) - 1941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의 대표적인 시집으로, 인간의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집에서 그는 죽음의 의미와 그것이 인간 존재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그의 철학적 사고가 반영됩니다.
"고통의 연대기" (Smärtans kronika) - 1953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의 후기 작품 중 하나로, 고통과 고난을 주제로 한 소설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인간 존재의 고통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을 탐구합니다. 또한, 고통을 통해 인간이 얻는 정신적 성숙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페르 라게르크비스트의 작품들은 그가 인간 존재에 대해 깊이 탐구한 결과물로, 그의 문학적 여정과 철학적 사유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들입니다. 각 작품에서 그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삶과 죽음, 신앙과 존재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페르 라게르크비스트는 195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PÄR LAGERKVIST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에 대한 감사 사인

페르는 1920년대 초, 창작 활동에 집중하며 자신의 내면의 불안을 극복하려 했다. 그는 이 시기에 어린 시절과 스몰란드 가족에 대한 기억을 시의 형태로 되살리려 했다. 이러한 작업은 그의 작품 현실과 함께하는 손님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또한, 그는 여러 작품에서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과 스몰란드의 노인들을 묘사하며,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를 남겼다.
페르는 두 번째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예술적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나 1928년, 그는 De Nio 문학상을 받았고, 1941년에는 예테보리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1년, 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66년, 아내 일레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그녀는 1967년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기에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렇게 적혀 있었다. “7월 19일 수요일 오후 4시 반, 일레인이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 그 이후, 페르는 여러 해석을 통해 이 관계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예술적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74년 7월 11일, 페르는 세상을 떠났다.

728x90
반응형
BIG

'노벨 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벨 문학상 1953년 수상자  (18) 2025.03.31
노벨 문학상 1952년 수상자  (8) 2025.03.31
노벨 문학상 1950년 수상자  (12) 2025.03.29
노벨 문학상 1949년 수상자  (18) 2025.03.29
노벨 문학상 1948년 수상자  (11) 2025.03.28